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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빈 맥다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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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어빈 맥다월은 미국의 군인으로, 남북 전쟁에서 북군 장군으로 활동했다.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에서 태어나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미-멕시코 전쟁에 참전하여 부에나비스타 전투에서 명예 대위로 진급했다. 남북 전쟁 발발 후 북동 버지니아 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나, 제1차 불런 전투에서 패배하여 비판을 받았다. 이후 여러 군 지휘부에서 복무했으며, 전후에는 샌프란시스코 공원 위원으로 활동하다가 1885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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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빈 맥다월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어빈 맥다월
로마자 표기Irvin McDowell
출생일1818년 10월 15일
사망일1885년 5월 10일
출생지오하이오주 콜럼버스
사망지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매장지샌프란시스코 국립묘지, 프레시디오 오브 샌프란시스코
미국 남북 전쟁 중 촬영된 맥다월 사진
군사 경력
소속미국 육군
북군
복무 기간1838년–1882년
최종 계급소장
지휘북동버지니아군
포토맥군 제1군단
버지니아군 제3군단
태평양 방면군
캘리포니아 방면군
서부 방면군
주요 참전 전투미국-멕시코 전쟁
미국 남북 전쟁
페어팩스 코트하우스 전투
비엔나 전투
알링턴 밀스 전투
블랙번스 포드 전투
제1차 불런 전투
제2차 불런 전투
기타 이력
기타 이력샌프란시스코 공원 위원

2. 초기 경력

어빈 맥다월은 오하이오주 콜럼버스 출신으로, 프랑스 유학 후 1838년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하며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2][3] 그는 웨스트포인트 교관, 미멕 전쟁 참전 등 다양한 경험을 쌓으며 경력을 발전시켰다.[3][4]

2. 1. 출생 및 가문

어빈 맥다월은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에서 아브람 어빈 맥도웰(Abram Irvin McDowell)과 엘리자 셀던 맥도웰(Eliza Seldon McDowell)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계는 영국계 및 스코틀랜드-아일랜드계 혈통이었다.[2] 그는 남북전쟁 당시 북군 기병 장교였던 존 버포드(John Buford)의 처남이었고,[3] 그의 형인 존 에이데어 맥도웰(John Adair McDowell)은 남북전쟁 당시 제6 아이오와 자원병 연대(6th Iowa Volunteer Infantry Regiment)의 초대 대령으로 복무했다.[2]

2. 2. 웨스트포인트 졸업 및 초기 군 복무

맥다월은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에서 태어났다.[2] 그는 프랑스 트루아에 있는 트루아 대학(College de Troyes프랑스어)에서 공부한 후, 1838년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그의 동기생 중 한 명은 훗날 제1차 불런 전투에서 적으로 맞서 싸우게 될 P. G. T. 보리거드였다.[3] 졸업 후 소위로 임관하여 제1 미국 포병 연대(1st U.S. Artillery)에 배속되었다.[3]

맥다월은 웨스트포인트에서 전술 교관으로 근무했으며, 이후 미멕 전쟁에 참전하여 존 E. 울 장군의 부관(aide-de-camp영어)으로 활동했다.[3] 그는 부에나비스타 전투에서의 공로로 명예 대위(brevetted captain영어) 계급을 받았다.[3] 전쟁이 끝난 후에는 육군 총무국(Adjutant General's department)에서 근무했으며,[3] 1856년 5월 31일 소령으로 진급했다.[3]

1848년부터 1861년까지 맥다월은 주로 상급 지휘관의 참모 장교로 복무하며 군수 및 보급 분야에서 경험을 쌓았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윈필드 스콧 장군과 가까운 관계를 맺었으며, 훗날 남부 연합군 장군이 되는 조셉 E. 존스턴 휘하에서도 근무한 경험이 있다.[4]

2. 3. 멕시코-미국 전쟁 참전

맥다월은 웨스트포인트에서 전술 교관으로 근무한 후, 미국-멕시코 전쟁에 참전했다.[3] 전쟁 중에는 존 E. 울 장군의 부관으로 활동했으며,[3] 부에나비스타 전투에서의 공로로 명예 대위(준장, brevetted captain) 계급을 받았다.[3] 전쟁이 끝난 후에는 총무국(Adjutant General's department)에서 근무했고,[3][4] 1856년 5월 31일 소령으로 진급했다.[3]

3. 남북 전쟁

1861년 5월 14일, 어빈 맥다월은 전투 지휘 경험이 전무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육군 준장으로 진급하여 북동 버지니아 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이는 그의 후원자였던 미국 재무부 장관 서몬 P. 체이스의 영향력이 작용한 결과였다. 맥다월 자신은 부대의 경험 부족과 준비 미흡을 인지하고 있었으나, 워싱턴 D.C. 정치인들의 압력으로 시기상조인 버지니아주 북부 공격을 감행해야 했다. 제1차 불런 전투에서 그의 전략은 창의적이었으나 복잡했고, 경험 부족한 군대는 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결국 큰 패배를 겪었다.

불런 전투 패배 후 조지 B. 매클렐런 소장이 포토맥 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자 맥다월은 그 휘하에서 처음에는 사단장으로, 이후 1862년 봄에는 제1군단 사령관으로 복무했다. 그의 군단은 워싱턴 D.C. 방어 임무를 위해 후방에 배치되었는데, 남군의 스톤월 잭슨 장군이 벌인 계곡 전역으로 인한 정치적 우려 때문에 매클렐런의 반도 전역을 지원하지 못하고 워싱턴에 계속 머물러야 했다.

이후 맥다월의 부대는 존 C. 프레몬트, 너새니얼 P. 뱅크스의 부대와 함께 존 포프 소장의 버지니아 군으로 통합되었고, 맥다월은 이 군대의 제3군단을 지휘하게 되었다. 시더 마운틴 전투에서의 공로로 훗날 명예 소장으로 진급하기도 했지만, 이어진 제2차 불런 전투에서의 참패로 인해 큰 비난에 직면했다. 그는 이 전투의 책임을 묻는 과정에서 피츠 존 포터 소장의 군법회의에 포터에게 불리한 증언을 함으로써 자신은 책임을 면했다. 공식적으로는 문책을 피했지만, 이 일로 인해 이후 약 2년간 실질적인 군 지휘권을 갖지 못했다.

3. 1. 북동 버지니아 군 사령관 임명

맥다월은 1861년 5월 14일 미국 육군 준장으로 진급했고, 5월 27일에는 북동 버지니아 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는 전투 지휘 경험이 전무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진 임명이었다. 이 임명에는 그의 후원자였던 미국 재무부 장관 서몬 P. 체이스의 영향력이 작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맥다월은 휘하 부대의 경험 부족과 전투 준비 미흡을 인지하고 있었고, 스스로 야전 지휘관보다는 보급 장교에 더 적합하다고 항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워싱턴 D.C. 정치인들의 압력으로 버지니아주 북부의 남군에 대한 조기 공격을 감행해야만 했다.

3. 2. 제1차 불런 전투

맥다월은 1861년 5월 14일 준장으로 진급했고, 5월 27일에는 북동 버지니아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는 그가 이전에 전투에서 군대를 지휘해 본 경험이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진 결정이었다. 이 승진에는 그의 후원자였던 재무부 장관 서몬 P. 체이스의 영향력이 일부 작용했다.

어빈 맥다월(왼쪽)과 조지 B. 매클렐런 장군


맥다월은 자신이 지휘하는 부대가 경험이 부족하고 전투 준비가 미흡하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스스로를 야전 사령관보다는 보급 장교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워싱턴 D.C. 정치인들의 압력으로 인해 버지니아주 북부의 남군에 대한 시기상조의 공격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제1차 불런 전투에서 맥다월이 구사한 전략은 창의적이고 풍부했지만, 동시에 야심 차고 복잡한 것이었다. 결국, 경험이 부족했던 그의 군대는 이 전략을 효과적으로 실행하지 못했고, 전투는 북군의 굴욕적인 패배로 끝났다.

불런 전투에서의 패배 이후, 조지 B. 매클렐런 소장이 워싱턴 D.C.를 방어하는 북군의 주력 부대인 포토맥군의 새로운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맥다월은 매클렐런 휘하에서 포토맥군 1개 사단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3. 3. 포토맥 군 제1군단장

제1차 불런 전투에서 패배한 후, 조지 B. 맥클렐런 소장이 워싱턴 D.C.를 방어하는 연합군인 포토맥 군의 새로운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1][2] 맥다월은 처음에는 이 새로운 군대에서 사단장으로 복무했다.[1][2]

1862년 3월 14일, 링컨 대통령은 포토맥 군을 군단으로 편성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맥다월은 제1군단의 사령관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자원병 소장으로 진급했다.[2] 그의 군단은 워싱턴 D.C.를 방어하기 위해 후방에 배치되었으며, 본래는 반도 전역을 진행 중인 매클렐런의 군대를 지원하기 위해 남쪽으로 행군할 예정이었다.[1][3]

그러나 남군의 스톤월 잭슨 장군이 셰넌도어 계곡에서 벌인 계곡 전역으로 인해 워싱턴이 직접적인 위협에 처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정치인들 사이에서 커졌다.[1][2] 이러한 정치적 압력으로 인해, 맥다월 휘하의 약 40,000명에 달하는 병력은 결국 워싱턴 방어 임무를 위해 후방에 잔류하게 되었고, 이는 매클렐런의 작전 계획에 차질을 빚게 만들었다.[1][3]

3. 4. 버지니아 군 제3군단장

결과적으로 존 C. 프레몬트, 너새니얼 P. 뱅크스, 그리고 맥다월이 각각 독립적으로 지휘하던 부대들은 존 포프 소장이 이끄는 버지니아 군으로 통합되었다.[1][2] 맥다월은 이 새로운 군대의 제3군단 지휘를 맡게 되었다.[1][2]

시더 마운틴 전투에서 보여준 공적으로 맥다월은 1865년 정규군 명예 소장으로 진급했지만,[1][2] 곧이어 벌어진 제2차 불런 전투에서의 참패로 비난받았다.[1][2] 당시 맥다월은 자신의 부하들 사이에서도 적과 내통한다는 의심을 받으며 널리 미움을 받기도 했다.[2]

맥다월은 제2차 불런 전투 중 명령 불복종 혐의로 군법회의에 회부된 피츠 존 포터 소장에게 불리한 증언을 함으로써 책임을 면했다.[1][2] 비록 포프와 맥다월은 서로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맥다월은 전쟁 후 자신은 장군으로 남고 포프는 대령으로 강등될 것을 예상하며 포프의 밑에서 복무하는 것을 감내했다.[2] 공식적으로는 책임을 면했지만, 이 사건 이후 맥다월은 약 2년 동안 실질적으로 군대의 지휘에서 벗어나게 되었다.[1][2]

3. 5. 제2차 불런 전투

존 C. 프레몽, 내털리얼 P. 뱅크스 장군과 함께 맥다월이 독립적으로 지휘하던 부대는 존 포프 소장의 버지니아 군으로 통합되었고, 맥다월은 이 군대의 제3군단을 이끌게 되었다.[1][2] 시더 마운틴 전투에서의 공적을 인정받아 훗날(1865년) 정규군 명예 소장으로 진급하기도 했으나,[1][2] 곧이어 벌어진 제2차 불런 전투에서의 참패로 인해 큰 비난을 받았다.[1][2] 맥다월은 자신의 부대원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없었으며, 일부는 그가 남부 연합과 내통한다고 의심하기도 했다.[2]

맥다월은 제2차 불런 전투 패배의 책임을 면하기 위해, 포프가 피츠 존 포터 소장을 항명 혐의로 군법회의에 회부했을 때 포터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였다.[1][2] 포프와 맥다월은 서로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맥다월은 전쟁 후에도 자신이 장군으로 남을 것이고 포프는 대령으로 돌아갈 것을 알았기에 포프 밑에서 복무하는 것을 감내했다.[2] 이 증언 덕분에 맥다월은 공식적으로 책임을 면할 수 있었으나, 이후 2년 동안 사실상 군 지휘권을 맡지 못하고 야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1][2]

4. 전후 경력

남북 전쟁 이후에도 군 복무를 이어가 1864년 7월 태평양 부서(Department of the Pacific) 사령관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여러 군관구 및 방면군 사령관을 역임했다. 1872년에는 정규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그러나 1879년, 러더퍼드 B. 헤이스 대통령이 임명한 재검토 위원회는 피츠 존 포터 소장의 사면을 권고하면서 제2차 불런 전투 패배의 책임 상당 부분을 맥다월에게 돌렸다. 보고서는 그가 우유부단하고 소통이 부족했으며, 북군 좌익 지휘관으로서의 임무를 소홀히 했다고 지적했다.

맥다월은 1882년 미국 육군에서 퇴역한 후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여 공원 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조경에 대한 관심을 살려 샌프란시스코 프레시디오(Presidio of San Francisco) 공원 조성 등에 기여하다가 1885년 5월 4일 사망했으며, 샌프란시스코 국립묘지(San Francisco National Cemetery)에 안장되었다.

4. 1. 군 복무

1864년 7월, 태평양 부서(Department of the Pacific)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여러 부서를 지휘했는데, 1865년 7월 27일부터 1868년 3월 31일까지 캘리포니아 부서(Department of California)를, 잠시 제4군사령부(Fourth Military Department, 남북 전쟁 이후 재건 시대 당시 아칸소주루이지애나주의 군정을 담당)를, 그리고 1868년 7월 16일부터 1872년 12월 16일까지 동부 부서(Department of the East)를 지휘했다.

1872년 11월 25일, 정규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같은 해 12월 16일에는 조지 G. 미드(George G. Meade) 장군의 후임으로 남부 군사지구(Military Division of the South) 사령관이 되어 1876년 6월 30일까지 복무했다. 이후 1876년 7월 1일부터는 태평양 군사지구(Military Division of the Pacific) 사령관을 맡았다.

1879년, 미국 대통령 러더퍼드 B. 헤이스(Rutherford B. Hayes)가 임명한 재검토 위원회는 피츠 존 포터(Fitz John Porter) 소장의 사면을 권고하는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제2차 불런 전투 패배의 상당한 책임이 맥다월에게 있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맥다월이 우유부단하고, 부하들과의 소통이 부족했으며, 무능했다고 평가했다. 특히 포터의 정보 요청에 제대로 응답하지 않았고, 남부연합군 제임스 롱스트리트(James Longstreet) 부대의 위치에 대한 정보를 존 포프 소장에게 제때 전달하지 않았으며, 군사 규정(Articles of War)에 따른 북군 좌익 지휘관으로서의 임무를 소홀히 했다고 비판했다.

1882년, 미국 의회가 군 장교의 의무 퇴역 연령을 64세로 정하면서, 맥다월은 그해 10월 14일 육군에서 퇴역했다. 퇴역 후에는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여 공원 위원으로 활동하며 조경에 대한 관심을 살렸다. 그는 샌프란시스코 프레시디오(Presidio of San Francisco)의 방치된 구역에 공원을 조성하고 골든 게이트(Golden Gate)를 조망할 수 있는 도로를 설계하는 등 도시 미화에 기여했다. 맥다월은 1885년 5월 4일 심장마비로 사망했으며, 샌프란시스코 국립묘지(San Francisco National Cemetery)에 안장되었다.

4. 2. 샌프란시스코 공원 위원

1882년 미국 의회가 군 장교에 대한 64세 의무 퇴역 연령을 도입함에 따라, 맥다월은 그 해 10월 14일 미국 육군에서 퇴역하였다.

퇴역 후 맥다월은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여 사망할 때까지 샌프란시스코 공원 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평소 가지고 있던 조경에 대한 관심을 살려 이 직책을 수행했으며, 샌프란시스코 프레시디오(Presidio of San Francisco)의 방치된 구역에 공원을 조성하고 골든 게이트(Golden Gate)의 경치를 조망할 수 있는 도로를 설계하는 데 기여했다.

맥다월은 1885년 5월 4일 심장마비로 사망했으며, 샌프란시스코 프레시디오 내에 위치한 샌프란시스코 국립묘지(San Francisco National Cemetery)에 안장되었다.

4. 3. 사망

1882년 미국 육군에서 퇴역한 후,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의 공원 위원으로 일하며 조경에 대한 애정을 발휘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 프레시디오의 방치된 구역에 공원을 조성하고, 골든 게이트의 전망을 조망할 수 있는 도로를 설계하기도 했다.

1885년 5월 4일 심장마비로 사망했으며, 샌프란시스코 프레시디오에 있는 샌프란시스코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참조

[1] 서적 null
[2] 웹사이트 Land of the Buckeye genealogy website https://web.archive.[...] 2010-08-17
[3] 서적 null
[4] 웹사이트 Irvin McDowell http://www.ohiohisto[...] 2011-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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